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매튜 B. 리지웨이 (문단 편집) === [[한국전쟁]]에서의 활약 === ||[[파일:리지웨이1.jpg|width=100%]]|| ||1951년 2월, 막 부임해 전선 상황을 시찰 중인 리지웨이. 한쪽 가슴에 보란 듯이 수류탄을 차고 있다.[* 참고로 항상 수류탄을 메고 다녀서 별명이 '[[강철 유두]]'(Old Iron Tits)였다.] || >'''왜 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의 [[문민통제|합법적인 정부가 내린 합법적인 명령에 따라]]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디뎠고, 적과 끝까지 싸울 것이다.''' >---- >리지웨이 회고록, Matthew B. Ridgway, Soldier: the memoirs of Matthew B. Ridgway, as told to Harold H. Martin. Greenwood, 1974 1950년 12월 23일, [[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한 후 리지웨이가 신임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리지웨이는 워낙 일처리가 빈틈없어서 [[도쿄]] 극동군사령부와 [[워싱턴 D.C.]] 정부 모두 그를 워커의 유일한 후임으로 지목했다. 맥아더는 워커의 부고를 듣자마자 리지웨이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입지는 워싱턴에서 훨씬 더 대단했는데, 당시에 어떤 인재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면 '''"이 사람은 리지웨이만큼 잘하고 있나?" 또는 "리틀 리지웨이라고 부를만한 인재인가?" 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그 정도로 리지웨이는 당시 미 육군 최고의 인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만 [[맥아더]]는 자기 라인의 사람만 좋아하여 [[리지웨이]]같이 자기가 잘 알지 못하거나 전략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을 싫어했고, 이에 따라 [[맥아더]]와 리지웨이는 6.25 전쟁 기간 중 많은 마찰을 빚게 된다. 이미 리지웨이는 낙동강 전선에 도착했을 때부터 맥아더가 무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맥아더의 지시와 별도로 단독작전을 수행시켰다. 리지웨이는 25일 미 제8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날 오전,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맥아더를 만났다. 그는 맥아더에게 "전황이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될 때 제가 공격을 개시한다면 반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제8군은 자네에게 달렸네, 매튜. 자네가 좋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하면 되네"라고 답했다. 리지웨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맥아더가 하급부대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해서 결국 한반도 북부에서 다 이긴 전쟁을 말아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가 자기의 행동에 간섭하기를 꺼렸던 리지웨이는 선수를 쳐 맥아더에게서 전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부대기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다. 26일 오후, 한국에 도착한 리지웨이는 곧바로 전선 시찰에 나섰다가 경악하게 된다. 여태까지 중공군에게 미친 듯이 깨졌던 충격 때문에([[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 참조) 아군 장교들은 [[안될거야 아마]]라는 패배주의적 태도로 일관했고 장병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중공군을 피해 남쪽으로 달아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가 들렀던 본부마다 걸려 있는 지도에 나타나 있는 적군의 규모나 위치마저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안 리지웨이는 격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정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48시간 안에 중공군을 보았을 때만 지도에 붉은 깃발(중공군)을 표시한다는 규칙을 공표했다. 리지웨이가 전방을 시찰하고 서울로 돌아간 31일 오후부터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부전선에 큰 구멍이 뚫리고 [[조선인민군|북한군]] 수개 사단이 눈사태처럼 밀고 내려오자, 리지웨이는 이를 방치해두면 북한군이 [[대구광역시|대구]]나 [[대전광역시|대전]] 부근을 향해서 돌진하여 제8군과 제10군단을 동서로 양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1951년 1월 3일, 리지웨이는 [[유엔군사령부|UN군]] 전군에 다음 진지선인 37도선(평택-원주-삼척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월 4일, 중공군의 수색병이 서울 교외에 출몰하는 상황이 일어나자 한국 정부는 다시 한번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천도하고, 유엔군의 전방지휘소는 대구로 이동했다. 서울 철수 때도 [[평양시|평양]]에서처럼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은 모두 소각시켰다([[1.4 후퇴]]). 리지웨이는 사기가 떨어진 장병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전하는 것만이 방책이라고 판단하고, 전투에 앞서 [[유엔군사령부|유엔군]]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에 들어간다. 우선 그는 미국 정부에 방위부대 10여 개 및 예비 포병대대를 추가 파병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한국에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지 않고 [[중국]]과 협상하려고 한다는 것과, 미국이 무기나 탄약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없었지만 병력 파견에는 인색한 편[* 12월 19일, 맥아더 [[원수(계급)|원수]]가 유엔군 파병으로 [[주일미군]]의 수가 부족해진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신규병력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지만, 정작 미국 본토에는 제82공수사단밖에는 남아있지 않았고 편성 중인 주(州)방위사단도 다음해 3월경이나 되어야 파병이 가능한 상태였기에 미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공수사단은 세계전략상 예비 병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미국은 '''있는 모든 병력을 한국에다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군이 [[태평양전쟁]] 이후 대규모 군축 중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미국은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극도로 적은 전비로 싸웠고 전력도 [[태평양전쟁]] 당시의 미군에 비하면 한참이나 약해진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미군의 전력은 유럽에도 상당수가 파견되어 있었고 해군으로도 상당히 분산되어 있었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중공군에 비해 부족한 병력 수를 포병 중심의 강력한 화력으로 보완하기로 했다. 유엔군은 [[부산]] 등 항구를 통해 [[쇼미더머니|풍부한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갈수록 매우 유리했다. 반면에 중공군은 중화기를 들여오는 데 한계가 있었고 미 [[공군]]의 폭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리지웨이는 장거리 포탄으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대응하기로 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포병사단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리지웨이는 공세 위주의 전략을 선호했기 때문에 자신의 공세 위주 전략을 따르지 않는 장교들을 전부 잘라버리고 자신의 견해에 찬성하는 장교들을 등용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중공군의 위협에 벌벌 떨며 삽질만 해대던 [[대한민국 국군|한국군]]을 통제하는 한편, 진지를 설치한 여러 겹의 방어선을 한반도 중남부 지역 곳곳에 설정해 두었다. 이 작전은 부산까지의 30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을 이용하여 사전에 진지를 준비해 두었다가 이 진지를 이용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화력으로 적에게 최대의 손실을 주고, 이 방어선이 돌파될 위험에 빠지게 되면 다음의 제2선 진지로 후퇴하는 방법을 되풀이한다는 내용의 작전이었다. 이는 얼핏 생각하면 지연작전과 비슷하지만, 목적이 단순한 방어와 지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방어의 반복에 의해 '''[[우주방어|중공군과 북한군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적의 전의를 약화시켜 가급적이면 그들의 전진을 저지하고 공세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타 막고 역러쉬'''인 셈. 또한 그는 정찰을 매우 중시하였기 때문에 모든 부대원들에게 적군의 전투물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오도록 명령하고, 자신도 저고도 비행을 하는 정찰기를 타고 직접 적군의 동태를 파악하기까지 했다.[* 이런 점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발터 모델]] 원수와도 비슷하다. 그 또한 정확한 전황 파악을 바탕으로 한 공세적 방어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중공군이 전투물자 보급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1951년 1월 중순부터 리지웨이는 매 전투마다 중공군에게 결정적인 손실을 입히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리지웨이는 정찰기를 타고 중공군 진지를 살핀 끝에 중공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져서 더 이상의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중공군이 피로하고 보급이 여의치 못한 틈을 타 대대적인 반격을 해오곤 했다. 특정 시점이 되면 제아무리 많은 인구[*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5억 6000만~7억 명 정도였다.]를 보유한 중국이라도 자국 군대의 적잖은 인명 손실에 어려움을 겪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리지웨이는 51년 1월 15일부터 이른바 ‘자석전술'을 구사했다. 대규모의 교전에 앞서 [[탱크]] 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기계화 부대로 끊임없이 중공군과 접촉해 [[소모전]]의 형태로 중공군 병사들의 움직임을 제약해 중공군이 예전과 같은 기습공격을 못하도록 억제했다. 유엔군에게 유리하면 중공군을 밀어붙여 요충지를 점령하는 반면 불리하면 잽싸게 물러나버리는 것이었다.[* 중공군 지휘부는 리지웨이가 이렇게 빨리 미8군을 정비해 반격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1월 8일에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끝났는데 미8군은 '''불과 1주일 뒤'''인 15일부터 곧바로 탐색전 성격의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지 한 달가량 지난 1951년 1월 25일, 리지웨이는 드디어 썬더볼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공격을 가했다.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조심스럽게 진군했다. 중공군이 이들을 뚫고 지나가거나 후방이나 측면에서 공격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리지웨이는 방어선이 중간에 끊어지게 하거나 주요 지점에 남한군을 배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썬더볼트 작전의 목표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리지웨이는 북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가서 [[한강]]의 남쪽 강둑에 도착하되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서서히 부대 규모를 늘리려 했다. 후방에서 부대를 더 보내려면 처음에 출발한 부대에 아무 문제가 없어야 했다. 리지웨이는 무조건 북쪽으로 밀고 갔다가 중공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공격이 아닌 방어에 급급해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31일, 유엔군은 중부전선의 [[홍천군]]-횡성군 축선을 따라 공격을 실시했는데, 비록 홍천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전선을 30km 이상 북쪽으로 밀어올리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에드워드 알몬드]]가 제10군단을 이끌고 진행하는 라운드업 작전은 2월 5일에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리지웨이는 심장부에 몰려드는 중공군의 규모가 날로 커지는 것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 지역은 썬더볼트 작전이 계획된 장소 바로 동쪽 편에 있었다. 리지웨이는 거기 나가 있던 아군이 수적으로 열세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원주시]]와 지평리가 중공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결국 그는 1월 28일에 제23연대 소속 부대를 하나둘 지평리로 보내기 시작했다. 2월 3일에 미 제2사단 23연대가 북진을 개시하여 전선의 서부와 중부를 연결하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2월 11일에 중공군의 제4차 공세가 시작되고 [[횡성 전투]]에서 한국군 [[제8기동사단|8사단]]이 '''단 4시간 만에 사단이 해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패배하자 전선 중앙에 큰 구멍이 뚫리게 된다. 결국 중공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미 제10군단은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열흘 전의 진격로를 뒤돌아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지평리를 점령했던 미군 제23연대와 [[프랑스군]] 대대도 [[여주시|여주군]] 인근으로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평리를 포기하게 되면 중부전선을 돌파한 중공군이 이제 막 선전하기 시작한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된다고 판단한 리지웨이는 23연대에 지평리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사수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지평리 전투]]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도 제4차 공세의 최종목표가 '''전선 전체를 37도선 이남으로 일거에 밀어붙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후퇴하도록 압박하기 위해서는 지평리를 반드시 차지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지평리 전투]]에서 미군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미 육군 제23보병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은 몇 달 전 청천강에서 벌어진 미 2사단의 참사에서 그나마 그의 연대를 건제 유지해서 후퇴한 적이 있다. 그는 훗날 [[대장(계급)|4성장군]]까지 올랐으며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7년 퇴역했다. 복무기간: 1929~1967년.] [[지평리 전투]] 중 리지웨이는 전투 상황을 주시하면서 [[공군]]과 보급품을 지원해주었으며, 14일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는 지평리의 23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마셜 C. 크롬베즈 대령이 이끄는 미 제9군단 제5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를 지평리로 보내 16일에 드디어 승전보를 듣게 된다! 만약 지평리가 중공군에게 함락되었다면 중공군이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측면에서 공격했을 것이고, 유엔군은 다음 방어선인 금강 방어선으로 후퇴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 극동군사령부와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중공군이 금강 방어선과 그 동쪽 방어선인 소백산맥 방어선에까지 도달했을 경우 '''유엔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한국 정부와 한국군은 [[제주도]]로 철수시켜 항전을 이어가도록 한다'''는 내용의 계획을 극비리에 검토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지평리 전투의 승전이 정말 극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